세비야에 대한 기억은 흐드러지게 핀 강변의 열대 꽃, 40도에 가까운 열, 그리고 플라맹고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를 보겠다고 어찌나 쏘다녔던지 저녁이 되면 범고래가 먹을양을 먹어치웠다. 게다가 밤에는 하루종일 꺼지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쓰고 잤는데도 정말 이가 덜덜거릴만큼 추웠다. 이렇게 바르셀로나에서 힘을 몽창 빼고서 세비야에 왔으니 아플 수밖에…

세비야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컸다. 캉캉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플랑맹코의 무희들, 카르멘이 배경이 된 담배공장, 열대과일들. 그러나 상상하는만큼 실망스러운건 여행만한게 없다고 했던가. 기대가 지나쳤는지 몸도 지치고 세비야도 그저 그랬다. 몸이 지쳤으니 세비야가 그저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세비야에서 먹었던 KFC와 버거킹밖에 없었다. 어디 맛집을 돌아다녀도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음식들이 하나같이 짜기만 했다. 카르멘이 배경이 된 세비야 대학교의 담배공장 건물을 보고서도 으음 그렇군. 그 유명한 에스파냐 광장을 보고도 아… 타일과 건물이 멋지군. 이런 정도 였으니 세비야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탓이리라.

그래도 세비야의 호텔은 별4개 짜리여서 시설도 너무 좋았고, 영어가 원활하게 소통되는 스태프들도 많아서 그나마 위로 되었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니 세비야 어딜가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바르셀로나는 그나마 프랑스어가 통해서 다니기 편했는데 세비야는 그런게 통하지가 않았다. 이렇게 불만 가득 한다발을 내려놓을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여행자로서의 예의가 아니라고. 편협한 생각으로 한 도시를 평가하는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약국으로가서 감기약을 얻어먹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텔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스 정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있지 않은가! 별도 몇개 붙어있고 사람도 많은걸보니 좋은 식당인가보다. 볼 것도 없이 추천받은 음식 몇 개를 시켜놓고 푸짐하게 이것저것 먹기 시작했다. 오호! 맛있는데. 그리스음식이 이런거구나. 역시 잘 먹으니까 세상이 달라보인다. 세비야의 이틀째는 세비야의 음식이 아닌 그리스음식으로 시작했다.

그리스음식으로 분기탱천해서 세비야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리고 저녁무렵에는 아직도 눈에 선명한 플라맹코 춤을 보았다. 호텔스태프의 추천으로 가게된 플라맹고 극장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한 감동을 준다. 플라맹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그저 집시들이 추는 춤 쯤으로만 여기고 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까혼, 기타, 박수에 맞춰 악보도 없이 구슬프게 울며 노래하는 남자가수를 배경으로 여성무희는 춤을 춘다. 발 놀림도, 드레스의 흐느적임도, 힘을 주는 팔의 움직임도 사실은 너무 구슬프다. 플라맹코는 신나는 춤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한과 혼을 풀어내는 살풀이 같았다. 여전히 열이 내리지 않아서 약을 먹어가며 봤던 플라맹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 저 한구석에서 먹먹함으로 자리잡고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탱고와 플라맹코를 비슷하겠거니 하고 덤벼들어봤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바르셀로나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그라나다처럼 찐한 풍경을 선사하지 않아도 세비야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플라맹코는 그렇게 또 수백년을 이어가겠지? 조용하고 차분한 세비야의 낮에 실망하지 말아라. 깜깜한 저녁 플라맹코를 보고나면 나처럼 생각이 확 달라질거다. 다음에 세비야를 또 가게되면 낮에는 느긋하게 낮잠이나 자다가 저녁에 플라맹코만 보고 올거다. 충분히 그래도 될만큼 플라맹코는 매력적이고 가슴 찐한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