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클로즈와 제프 브리지스 이름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할만한 영화.  톱니 바퀴의 칼날.]

글렌 클로즈와 제프 브리지스 주연의 영화 “톱니 바퀴의 칼날”에서 범인을 찾게 되는 단서는 타자기에 있다. T자가 올라가 찍히는 타자기.  글렌 클로즈가 손을 벌벌 떨면서 타자기를 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하지만 나는 그때 글렌 클로즈보다 문제의 멋진 타자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가끔은 이렇게 컴퓨터 자판이 아닌 타자기로 타닥타닥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타자기로 글을 쓰다보면 범인을 잡는 쾌거(?)를 이룰지도 모를테니까.

[디자인사 시간에 화면 가득히 등장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올리베티사의 발렌타인 타자기. 에토레 소트사스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었던 아이다.]

“톱니 바퀴의 칼날”만큼 멋진 타자기를 연거푸 본 적이 있다.  에토레 소트사스가 디자인한 올리베티사의 붉은색 발렌타인 타자기.  이 붉은색 타자기는 대체 이걸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야?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한 장본인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보게 된 에토레 소트사스.에토레 소트사스를 한 마디로 평하자면  “멋지고 쿨한 양반”이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신입사원의 아이디어가 멋지면 네가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할 정도로.  또 한가지 그가 디자인세계에 발을 들이고 60이 되어서야 성공의 반열에 들고도 허허 웃어넘겼다는 것.  그렇게 오랜시간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았던 에토레 소트사스.

[에토레 소트사스의 세계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칼튼 책장. 유쾌함과 휴머니즘이 진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그의 진가가 조명받기 시작한 때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이 불기시작한 1980년대였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작품이 포스트 모던하다고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디자인사에서 인식되는 에토레 소트사스는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처럼 되어 있다.  그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모더니즘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고, 이를 타개하고자하는 미국의 몸부림이 그 배경이다.  포스트 모던 등에 올라타 피로감도 덜고 소비도 늘려보자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탓에 에토레 소트사스의 유쾌함과 휴머니즘 정신은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선봉에 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미국의 많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은 에토레 소트사스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원본을 그대로 흡수해 자신의 이름을 얄팍하게 얹는 술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1980년의 포스트 모던 디자인은 모더니즘의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것은 에토레 소트사스도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포스트 모던의 선구자라는 칭호를 좀 즐긴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토레 소트사스 말년의 모습. 이탈리아인 특유의 느긋함과 멋스러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에토레 소트사스는 1917년에 태어나 2007년에 타계했다.]

에토레 소트사스의 디자인을 보면 앞서 말했듯이 기능성보다는 유쾌함과 휴머니즘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디자이너들과 멤피스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 그룹은 그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들의 모임이다.   1981년에 한 멤피스 그룹의 전시회는 이전 모더니즘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디자인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자신이 하고싶은 디자인을 먼저하고 기능성은 뒤에 고려하는 재밌는 발상을 보여준 것이다. 결과는? 위에서 밝힌대로 전세계 디자인의 판도를 멤피스 그룹의 디자인으로 바꾸어 버렸다. 멤피스 그룹에는 한스 홀라인, 마이클 그레이브스, 미켈레 데 루키 등 후에 디자인 거장들이 되는 디자이너들이 포함되었다.  역사에 남은 많은 사건들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 생기는 결과인 것으로 볼 때 에토레 소트사스도 자신의 취향이라는 우연과 모더니즘의 피로감이라는 필연이 겹쳐 디자인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가 멋진 디자이너라는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를 정말 멋진 디자이너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오늘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난해한 디자인제품을 우리가 스스럼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디자인에 대한 모험을 감행하게 해준 에토레 소트사스에게 감사를 표한다.

[한때 알키미아 스튜디오에서 에토레 소트사스와 같이 일을했던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프루스트 소파.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에토레 소트사스만큼이나 포스트 모던디자인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그도 정작 자신의 디자인이 포스트 모던하다고 말한적은 없지만.]

[멤피스 그룹의 일원이었던 미켈레 데 루키의 조명디자인.  볼때마다 왠지 센과 치히로가 생각나서 기분좋게 만드는 조명이다.]

* 자세한 영화정보는 아래 주소를 참조할 것.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040 (“톱니 바퀴의 칼날” Jagged Edge, 1985)

** 미국이 추상미술의 선두주자라는 인식을 전세계에 심어주기 위해 피카소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퍼뜨렸고, 피카소는 실상 추상미술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없이 그 상황을 즐겼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그림값도 올라가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곳이 많아졌을 테니까.

 

매직으로 쓱쓱 그린듯한 사람, 강아지, 자전거.   그래피티라고 하기엔 너무 세련되었고, 픽토그램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머러스하다.  내가 키스 하링에 빠져든 이유다.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메면 영락없는 범생이의 외모를 자랑하지만, 자신의 집과 몸을 온통 물감으로 칠하고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에 변태처럼 포즈를 취하는 사람이 키스 해링이다.  그는 미국 뉴욕의 School of Visual Arts(일명 SVA)에서 공부를 한 탓에 자연스럽게 뉴욕의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세계를 구축해 나아갔다.  자신의 애환과 울분을 담아내는 길거리의 일반적인 그래피티와 달리 키스 하링은 신나고 간결한 그래피티는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는 비주얼 랭귀지를 탄생시킨 머리좋은 작가였다.  듀란듀란* 의 키보디스트인 닉 로즈와 친구였던 키스 하링은 닉 로즈가 출연했던 MTV 프로그램의 무대세트에도 그림을 그렸고, 호주 멜번의 한 도시벽에도 그의 그림을 그려넣었을 뿐만 아니라 스팅, 마돈나, 본 조비등의 쟁쟁한 가수들이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의 자켓도 디자인했다.  여기에 앱솔루트 보드카, 럭키스트라이크 담배, 코카콜라에서도 키스 하링을 작품을 적극 이용했다.  최근 마돈나의 공연실황 Sticky and Sweet에서도 키스 하링의 작품을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80년대 마돈나와 키스 해링과는 인연이 깊어서 마돈나의 Like a Virgin 퍼포먼스에 입고나온 재킷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키스 해링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잘 어우러지고 주목성 또한 뛰어난데 있다.  디자인의 세계화를 생각해야 하는 현대 디자이너들의 고충을 한번에 훅~가게 만드는 작가 그가 키스 해링이다.  * 8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록밴드.  실력도 출중하고 외모도 훈훈해서 80년대 언니들한테 인기좋았던 그룹이다.  듀란듀란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곡은 007 뷰투어킬의 주제가였다.  당시의 제임스 본드는 로저 무어였다. 지금은 완전 할아버지이지만, 그때의 로저 무어는 섹시로 말하면 둘째가면 서러웠다.   아… 이 시점에서 나이든거 팍팍티난다. 아마 80년생 부터는 먼나라이웃나라 얘기하는줄 알겠지? ㅜ.ㅜ

키스 해링은 자신의 작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뉴욕 소호에 Pop Shop이라는 상점을 열었었다.  Pop Shop에서는 그의 작품이 들어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등을 파는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었는데, 항상 그렇듯 예술계에서는 키스 해링의 이런 상업적인 시도를 곱게 보지는 않은듯 했다.  그렇지만 그의 소박한 시도 덕분에 나에겐 다이어리와 그의 캐롤 앨범을 소장하고 있으니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겠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쳤던 살바도르 달리나 앤디 워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예술계의 그런 비평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살바도르 달리는 미국은 설사처럼 돈을 쓸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고, 앤디 워홀은 대량생산과 복제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애썼다. 그리고 현재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그들의 그림이 옥션에 등장한다.)

그는 예술생활을 뉴욕의 길거리 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재미와 위트를 지니며 동시에 공공성을 지닌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82년부터 1989년 그가 죽기 1년전까지 자선단체, 병원, 어린이 병동, 보육원을 위한 공공예술작품을 50점이상 진행했다.  뉴욕  FDR’s Drive의 상징이 되어버린 “Crack is Wack(마약은 인생을 망친다.)” 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유의 여신상 100주년 기념식, 파리의 Necker 어린이 병동 익스테리어, 과거 서독의 베를린 장벽 등 많은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공공성을 지닌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후에도 그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까지도 많은 공공디자인의 일환으로 키스 해링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비백인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차별제도.   남아공의 백인은 겨우 16%밖에 되지 않지만 백인이 아닌 다른 다수인종을 차별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제대로 된 제도이다.) 정책비판운동, 에이즈에 대한 홍보, 마약철퇴 운동 등에 꾸준히 그의 작품이 인용되고 있다.  대중문화의 가진 가장 큰 특징인 의미의 확대 재생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키스 해링은 안타깝게도 33살의 어린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살아있다면 분명히 더 인상깊고 뜻있는 그리고 재미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을텐데 참 아쉽다.  친분이 두터웠던 앤디 워홀과 장 바스키아가 죽고서 에이즈가 더 악화된 탓에 그렇게 일찍 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을 마치려는 순간 뜬금없는 생각하나!  담낭수술을 성공적으로 하고서 웃고 떠들다 자다가 심장마비로 비명횡사한 앤디 워홀, 헤로인을 밥먹듯이 즐기다 29살에 죽은 장 미셸 바스키아, 남들은 에이즈 발병이 10년도 넘게 걸리는데 후딱 발병해 33살에 가버린 키스 해링.  자신이 내뿜는 에너지에 압도되서 폭풍처럼 인생을 살다가는 예술가들은 죽음도 독특하다.  극적인 죽음을 맞이할수록 사후에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동네가 예술하는 동네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듯하다.  이들 삼총사의 작품은 이들이 죽고나서 옥션에서는 인기 품목에서 빠지지 않는다.  예술동네는 참 재밌는 동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