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불새출의 천재 작가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직접 작품을 보고도 글을 못쓰게 할만큼 압도적인 상상력.

이름만으로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이름 알렉산더 맥퀸.

그의 작품을 보고는 이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할까라는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한 동안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됐다. 그가 죽고서 5년 만에 그가 한 작품들을 직접 보았고 그 후로 3년이 지나서야 그에 대해 쓰게 됐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이다. 그의 작품전은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에서 열렸다. Savage Beauty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장 시간도 예약을 하고 가야했다. 저녁시간에 예약시간을 겨우 잡고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이하얘졌다. 이 인간은 대체 뭐길래 이런걸 만들어 냈지? 사람이 아니라 에일리언이야. 오마이갓! 별 소리가 다 나왔다. 런웨이에서 보던 그는 기괴하고 엉뚱했다면 직접 본 그는 카리스마 있고, 감동적이며, 기가 찼다. 지극히 영국스럽지만 지극히 영국을 뛰어넘어 허를 찌르는 그 기세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2015년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서 했던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aqueen)의 새비지 뷰티전(Savage Beauty).
영국 디자이너들에게서 보기 힘든 엣지 넘치는 테일러링.

알렉산더 맥퀸은 16살 때부터 25년 동안 패션계에 몸을 담았으니 패션쪽의 커리어로는 상당한 기간을 보냈다. 그는테일러 숍에서 견습생을 시작으로 무대 의상을 제작 하기도 하고, 세인트 마틴에서 패션 석사를 거쳐서 지방시와 자신의 레이블까지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상상하고 구현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옷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바탕에는오랜 기간 테일러링을 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텍스타일 자체 혹은 옷을 해체해 레이어 하는 방식을 쓰는 영국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테일러링에 있었다. 그의 옷들은 어느 것 하나도 텍스타일로만 옷을 보여준다거나 지루한 레이어를 해서 무대에 올린 적이 없다. 그가 내세운 쇼의 주제에 맞게 모든 옷을의도에 맞게 재단하고 만들어내 옷 자체로 의미가 전달되도록 했다. 이 지점이 여타 영국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가장극명하게 다른 점이다.

알렉산더 맥퀸이 죽기 직전까지 만들었던 작품들. 실제로 보면 그의 죽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영국인의 아이덴티티를 되새김하다.

그가 여타 영국 디자이너들과 극명한 차별성을 가진데는 영국 역사에 대한 이해를 옷에 녹여냈다는 또 한가지의 무기가 있다. 그가 영국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계보학과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던 엄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예로, 부계쪽의 계보학을 연구하면서 2006년 컬렉션에서 컬로든 전투를 다루게 되는데, 컬로든 전투는 스코틀랜드 인버네스 주에서 있던 전투로 2000명이 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 병사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다. 스튜어트가를 왕위에 복귀시키려고 하는 마지막 전투가 컬로든 전투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여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2006년 컬로든 전투를 쇼에 올리게 된다. 이 컬렉션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타탄체크, 깃털과 수사슴 뿔형태로 만든 머리쓰개, 러프 레이스로 만든 반투명의 베일을 과감하게 선보인다. 그가 영국 역사를 옷에 녹여내는 방식은 개인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지극히 영국적이고 지극히 묘한 감정이 들게하는 2006년 컬렉션.

 

│파격의 파격을 거듭해 세계적인 디자이너 대열에 올랐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 그다지 충격이지 않았을 만큼 괴짜의 삶을 살았다.

파격을 넘어 불편함을 느끼게 했던 섹슈얼리티.

옷에 대한 표현은 악동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시각적으로 쇼킹한 것들이 많았다. 지금은 너무 보편화 되어 있지만1990년대에는 생소하기 그지 없었던 로우 라이즈 팬츠(1993년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범스터라는 바지는 엉덩이를 반쯤 내놓게 했다), 로봇이 뿌리는 페인트를 맞으며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델,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펜싱 마스크, 박제된 독수리를 어깨에 단 베스트, 깃털로 뒤덮인 코트, 사슴뿔이 달린 머리 장식 등 셀 수 없이 많은 쇼킹한 장치들을보여주었다. 실제로 그의 의상들을 보면 고혹적이지만 날 것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대자연 앞에서나 느낄 수 있는 숭고미(Sublime)을 한 인간이 만들어낸 의상에서 느낄 수 있다니 참 대단하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새비지 뷰티전에서는 마네킨이 입은 드레스 위에 로봇이 페인트를 뿌리는 걸 직접 보여줬다.
천재들의 끝은 모두 극적일 수 밖에 없을까.

알렉산더 맥퀸은 그의 쇼만큼이나 극적으로 그의 삶을 마감한다. 자살이었다. 그를 처음 제대로 알아봐 주었던 이사벨라 블로우(영국 보그 전 편집장-그의 석사 졸업전에 선보인 의상들을 모두 구매한 첫 고객이었고 물심양면 그를 보필해 주었다.)와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패션계에 등장한 것도 이 세상을 등진 것도이렇게 극적일 수 있을까 싶다. 그의 작품들을 연대기순으로 놓고 보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짐작이 간다. 이것 이상 그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불새출의 천재 디자이너가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더 이상 슬프지만은 않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랜 시간 기억할 것이고 애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 아닐까 싶다. 파격을 넘나들다 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알렉산더 맥퀸.

참조: https://www.mirror.co.uk/news/real-life-stories/alexander-mcqueen-created-fashion-empire-12546697
https://www.biography.com/news/alexander-mcqueen-documentary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films/features/alexander-mcqueen-biopic-fashion-designer-documentary-release-date-uk-a8385671.html
「Alexander McQueen : Genius of a Generation」,2010, Kristin Kn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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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를 알게 된 건 다시 그녀의 브랜드를 부활 시킨다는 어느 신문기사였다. BBC였는지 허핑턴 포스트 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용은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그렇게 패션계에서는 사라져서는 안되었다것과 그녀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했었는지를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브랜드의 부활이 기대된다는 것이었다. 발음하기도 힘든 그녀의 이름은 내게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왼쪽은 안나 윈투어가 멧갈라에 참석했을 때의 드레스. 스키아파렐리에 대한 윈투어의오마주.

한 동안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접하게 된 건 초현실주의를 들여다 볼 때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후로 많은 작가들이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에 접근한 초현실주의. 야릇하게 무의식을 툭 건드리는 것도 같고 다소 정신나간 이들의 끝없는 자기 변명도 같은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후앙 미로(Joan Miro) 들이 파인아트 분야에서 이름을 내고 있을 때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는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있었다. 실제로 스키아파렐리는 살바도르 달리, 마르셸 뒤샹, 만 레이하고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패션에 초현실주의를 적극 차용하며 패션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 랍스터 드레스, 구두 모양의 모자, 손톱을 붙인 장갑 등은 이들과 교류하며 나온 것들이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모습. 벨 에포크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스키아파렐리. 정작 자신은 못생겼다고 속상해 했다. 집안 사람들 인물이 다들 훤칠한 듯.

그녀가 패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의 유쾌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접고 파리에 와서였다. 그때 만나 스키아파렐리에게 패션을 권유한 사람이 폴 푸아레(Paul Poiret). 그녀가 왜 패션을 예술로 접근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키아파렐리는 아주 지적인 사람이었다. 16살 때는 시집도 내고, 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하고(전공은 아니고 청강이었다),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지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탈리아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동양학자였던 아버지, 천문학자인 삼촌을 두고 있었던 배경도 한 몫했다.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주해서 없이는 보지 못하는 문학적 은유들이 꽤 많다. 패션계에서 자서전을 낸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하나는 폴 푸아레고 또 하나는 스키아파렐리다. 너무 지적이었던 그들이 패션계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한건 아이러니이지만.

지금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당시에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스키아파렐리의 트롱포뢰유 니트. 바로크 시대 화가들이 주로 썼던 재밌는 기법을 재밌게 차용했다.

 

패션에 예술을 끌어들였다고 해서 그녀가 비즈니스적으로 성공을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니트에 리본모양을 직접 넣어 뜨개질을 해 마치 리본을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둔다. 흔히들 트롱프뢰유라고 하는데 가짜인데 마치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법이다. 바로크 시대의 그림을 보면 그림 위에 커턴을 살짝 쳐 놓았는데 진짜 커텐이 아니라 사실은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마치 커텐이 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니트의 큰 성공으로 그녀는 쿠튀르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냈다.

초현실주의의 패션디자인 버전. 패션의 가장 큰 이점은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해도 모두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점이다.

극작가였던 장 콕토가 그린 일러스트를 이브닝 코트 넣기도 하고,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만들어준 곡예사 모양의 단추를 달고, 살바도르 달리의 가재를 드레스에 과감하게 넣었다. 그녀의 이런 시도는 헐리우드 배우 캐서린 햅번, 메 웨스트(그녀의 몸을 따와 향수 ‘쇼킹’에 사용하기도 했다), 마들렌 디트리히 그리고 에드워드 8세의 부인인 심슨 부인 등이 단골로 찾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문학과 극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던 스키아파렐리는 헐리우드 영화의 의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녀의 예술적 감각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el)이 치를 떨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게 했다. 스키아파렐리가 패션계에서 손을 뗄때까지 샤넬은 스키아파렐리의 예술적 재능을 매우 부러워하고 의식했다고 한다.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이런 컨셉추얼한 쿠튀르 드레스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스키아파렐리에게도 시련이 닥쳤는데 그 시련은 1,2차 세계대전이었다.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간호사로도 활동을 하고 프랑스를 전쟁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샤넬이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것과는 참 대조적인 부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로 복귀한 스키아파렐리는 이전과는 다르게 성공을 하지 못했다.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고 쿠튀르에 대한 수요도 상당히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패션을 비즈니스보다는 예술로 접근하면서 파리의 패션하우스의 생산 시스템에 너무 젖어있었다. 세상은 이미 미국의 대량생산 방식을 쫓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1954년 스키아파렐리의 아틀리에는 문을 닫았고 그녀는 패션계에서 은퇴한다. 그 후 튀니지에 있는 하마멧에 자주 머무르면서 자서전도 내고 조용히 삶을 마쳤다.

현대의 패션디자이너들이 스키아파렐리에게 헌정하는 오마주들.,

패션계에 불꽃처럼 등장해 가장 환하게 빛을 내다가 소멸하고 만 스키아파렐리. 샤넬처럼 대량생산에 익숙한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백이나 슈즈로 수익을 냈더라면 멋진 작품들을 더 보여주었을텐데 아쉽기만 하다. 하긴 샤넬처럼 살았다면 스키아파렐리가 될 수 없었겠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복식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씩 회자되는 엘사 스키아파렐리. 스키아파렐리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오마주를 바칠 정도로 영향을 많이 미쳤다. 스키아파렐리가 여성들에게 한 조언 중 하나로 글을 마치려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항상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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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역사를 떠받들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의 유전자에는 선조들의 것과 자신의 것을 잘 섞어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강박에 시달린다.  재벌집 자재들이 부모의 존재를 절대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것처럼. 이탈리아의 패션브랜드들이 간지나고 웨어러블 한데는 조상들의 유물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명품에도 척척 끼워주고 실제로 대를 물려서 넘겨주어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다.  그만큼 나의 디자인을 누가 어떻게 보느냐를 아주 신경쓰는 존재들이면서 또한 누구에게나 팔릴만한 아이템들을 귀신같이 잘도 내놓는다. 밀라노에서 선보이는 많은 아이템들이 꼭 가지고 싶은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는 이유는 여기에서 있다. 이런 이탈리아 분위기에서 프랑코 모스키노는 이탈리아 패션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프랑코 모스키노는 이탈리아의 장 폴 고티에라고 불리기도 했다.  장 폴 고티에는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누군지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시 한 줄 쓰겠다.  장 폴 고티에는 마돈나의 월드투어에서 뾰족 브라와 보디슈트를 디자인해 준 디자이너다.  프랑스의 오트 쿠튀르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모스키노가 장 폴 코티에와 이름을 같이 올린건 이탈리아 패션계에서는 정말 튀는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린지 로한처럼 사건사고로 얼룩진 행사를 만들어 낸게 아니라 아주 파격적이고 과격한 패션디자인을 선보였다는 얘기다.   고티에와 모스키노가 패션계에서 앙팡 테리블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패션에 대한 둘의 접근법은 많이 달랐다.  고티에가 패브릭과 형태를 가지고 그의 작품을 실험했다면, 모스키노는 기본적인 형식과 전통적인 방법들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스키노의 저변에는 그가 대학에서 파인아트를 전공했다는 것이 주요했다.

 

그가 주목하고 연구했던 시대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였다.  패션을 바탕으로 파인아트를 차용했다면, 모스키노는 파인아트에 패션을 차용했다.  이 점이 그를 이탈리아의 앙팡 테리블로 만들었다.  그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을 뒤샹과 마그리트를 상상하니 기분이 좀 오묘하다.  그는 패션을 자신의 표현수단으로 삼아 파인아트 작가들이 늘 그렇듯 현실을 엣지있게 비판하곤 했다.  비싼 모피와 플라스틱을 섞는다더지, 캐시미어 재킷에 “비싼 재킷(Expensive Jacket)”이라고 수를 놓기도 했다.  그림이 팔리면 팔리수록 값이 치솟는 현실과 값이 얼만 안되는 재료로 수천만원의 값을 받는 현대 패션계를 동일선상에 본 것이다.

그의 통렬한 비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패션에 더 열광하는 팬층을 더 두텁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신선했고, 내 마음을 대변해주듯 시원했고, 어디에 입고 다녀도 독특했을 테니 당연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조상대대로 물려내려져 오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답습되는 입을만한 옷들이 아닌 자신의 비판적 생각을 옷에 담아낸다는 것은 이탈리아 패션계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독보적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나이 지긋한 알마니, 베르사체, 프라다 등이 떡하니 버티고있는 현실에서  이탈리아 신진 디자이너들이 설 자리가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이탈리아를 떠나 패션 유목민으로 세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능력을 풀어놓는 중이다.  역사 깊어서 참조할 것이 많아 부럽기도 하지만 그 역사가 주는 깊이많큼 루키들이 설자리는 무겁기만 한 것이 이탈리아 패션계의 현실이다.  모스키노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그당시 사회적인 이슈들을 자신의 패션에 끌어들였다.  그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옐로 스마일 심볼, 세계 평화를 위한 반전쟁 심볼, 사회적 차별에 반대하는 하트 심볼등을 사용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스키노의 하트 심볼이 사회적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라니 새삼스럽다.

 

이런 모스키노의 지적인 패션활동이 오랜기간 계속되었다면 이탈리아에서도 파격적인 시도가 더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 이렇게 침체된 이탈리아 패션계에 신선함과 통렬함을 계속 불어 넣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뒤샹처럼 톱숍에서 원피스를 하나사서 프랑코 모스키노라고 햄라인에 쓰거나 마그리트처럼 트롱프뢰유(trompe-l’oeil) 기법을 사용해 끊임없이 눈속임을 했을것이 틀림없다.  생각만해도 짜릿하고 멋지다.  그런데 재주가 많고 사랑을 많이 받으면 꼭 신이든 사람들의 시샘을 받기 마련인지라  모스키노도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에이즈와 배의 커다란 종양 때문이었다.  애통하고 또 애통한 일이다.  모스키노 사후에는 동업자였던 로셀라 자르디니가 모스키노를 이어가고 있다.  모스키노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마약이나 폭력, 동물학대 반대 캠페인도 벌이고, 에이즈 후원단체도 지속적으로 운영해가고있다.  모스키노 칩 앤 시크 부티크 호텔도 만들고. 그의 사후에도 모스키노는 파격적이고 심사뒤틀리지만 실험적이고 입기 좋은 옷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모스키노 칩 앤 시크는 미셸 오바마가 즐겨입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왼쪽이 헐리우드 버전, 오른쪽이 스웨덴 버전의 The Gril the the Dragon Tatoo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기억은 사람들의 정서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어로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고 번역된 The girl with the Dragon Tatoo의 헐리우드 판과 스웨덴 판을 보면서 이 점을 더 피부로 느끼게 됐다. 같은 책을 기반으로 해 만든 영화가 누구의 정서와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두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헐리우드 사람들이 바라보는 스웨덴이 더 음습하고 더 춥고 더 드라이 했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 촬영했던 닥터 지바고 같은 느낌이랄까. 스웨덴 본토 사람들이 바라보는 스웨덴은 추위도 견딜만하고 일상도 더 소소했다.  그래서 지루하기 까지했으니까.

[전체의 풍경을 바라 본 모네의 그레누이에]
[부르주아의 일상을 집중해서 바라 본 르누아르의 그레누이에]

같은 대상을 놓고 그린 그림인데도 누가 보고 그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세기 부르주아 들의 일상을 그린 모네와 르느와르의 그레누이에(The Grenouillere). 그 둘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대상을 보고 그림을 그렸는데 주목한 부분이 각각 다르다. 모네는 사람들과 어우러진 풍경 특히 물에 주목을 했고, 르느와르는 풍경보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더 주목했다. 같은 그림인데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왜 모네가 풍경 화가고 르느와르가 인물화가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세잔이 그린 아부루와즈 볼라르. 지적으로 보인다.]
[피카소가 그린 아부루와즈 볼라르의 초상화.]

인상파 그림에 주목해 큰 그림상이 된 아부루와즈 볼라르.  그는 그림상으로 자리 잡기 위해 인상파에 주목했고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기 위해 길목에서 화가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그림을 모아서 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볼라르의 초상을 그린 화가 중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세잔은 볼라르를 샤프하고 지적인 부르주아로 묘사한 반면 피카소는 보이는 면면을 조각조각 분절해서 보면서 볼라르를 과묵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그려놓았다.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면 중에 어떤 것에 주목했느냐에 따라 달리 그렸겠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참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어딘가 중세의 냄새가 난다.]
[수태고지의 찰나를 보여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서양 미술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작품 중에 하나인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  이 그림은 순전히 화가의 상상에서 나오는 그림인데 화가가 살았던 시대와 수태고지의 어느 부분에 더 집중했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진다.  대표적으로 르네상스 초기의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와 르네상스 전성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표현이 사뭇 다르다.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중세시대의 끝머리에 나온 작품이다 보니 많이 설명적이고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고 수태고지의 명을 겸허히 받아 들이는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다.  반면 다 빈치의 수태고지는 하나님이 명하는 말씀을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전하는 찰나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나의 찰나를 그림에 듬뿍 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정서를 가지고  어떻게 대상을 바라 보느냐에 따라 같은 주제가 같은 대상이 달리 보인다.  인간의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작위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존재하고 인정해야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직도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당신 자신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당신 자신은 틀렸다고.

[프로엔자 슐러의 포스터]

이번에 소개할 아티스트는 패션 디자이너 프로엔자 슐러에 대한 것이다.  프로엔자 슐러는 잭 맥콜루와 라자로 헤르난데즈 듀오가 이끄는 브랜드다.  이름이 유럽 스타일이어서 그렇지 이 둘은 미국 출신으로 파슨스 졸업전시회를 같이 하다가 지금까지 듀오로 남아있는 사이다.  프로엔자 슐러는 맥콜루와 헤르난데즈 엄마들의 처녀적 성을 하나씩 따서 만든 이름이란다.  기발한데!  잠깐 든 생각인데, 만일 이 듀오가 유럽 출신이었다면 빅터&롤프처럼 간단명료한 브랜드 네임을 썼을 것이다.  좀 오래된듯한 느낌을 주려면 고색창연한 유럽의 도시지명 느낌이 나도록 이름을 지어야 했을 것이다.  프로엔자 슐러는 이름만 들어서는 절대 미국의 브랜드로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패션디자이너가 옷을 잘 차려 입은것은 그만큼 작품에 신경을 덜 쓰는 증거라고. 잭 맥콜루와 라자로 헤르난데즈의 소박한 피날레 의상이 성실함을 보여준다.]

프로엔자 슐러가 뉴욕 패션 위크의 RTW(Ready-to-Wear)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이 듀오의 졸업작품 컬렉션을 바니스 뉴욕에서 모두 사들이면서였다.  존 갈리아노나 알렉산더 맥퀸처럼 졸업 전시와 동시에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를 한 것이다.  이 듀오는 2002년부터 정식으로 여성 의류와 액세서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발렌티노 그룹에서 45%의 지분을 매입하면서 재정적으로도 안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발렌티노가 쿠튀르 드레스만 잘 만드는 줄 알았더니 디자이너들을 보는 눈도 꽤 예리하다.  프로엔자 슐러는 뉴욕이 너무나 사랑하는 디자이너로 미국 CFDA(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에서 주는 상을 지금까지 5번이나 받았다.  아무리 뉴욕의 패션디자이너들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CFDA의 상을 5번이나 받는다는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신예들이다.

 [프로엔자 슐러의 PS1. 일명 판초백]

프로엔자 슐러하면 엄청난 검색의 양을 자랑하는건 2008년 PS1 백을 출시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흔히 사첼 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럭셔리하고 우아하게 발전시켜 내놓은 백이다.  사첼(Satchel)은 손잡이가 있는 학생들이 드는 가방을 뜻한다.  사첼 백은 직사각형 모양의 책가방처럼 손잡이나 어깨 끈이 있는 숄더 백을 일컫는다.  프로엔자 슐러의 PS1 사첼백은 쿠튀르만 아니라면 어느 의상과 매치해도 무난하고 옷과 잘 어우러지는 희한한 현상을 보인다.  놀랍다 못해 희한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PS1을 메어주면 사람이 좀 스마트해 보이는 효과도 가져다 준다.  참… 이들이 능력자기는 능력자다.  그리고 PS1은 신의 한수이기도 하다.  제시카 알바, 커스틴 던스트, 클로에 셰비니 등 헐리우드 셀리브리티들이 하나같이 프로엔자 슐러의 판초백(PS1)을 들고 다니면서 파파라치 컷에 끊임없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PR이나 마케팅없이 파파라치컷을 이용해 프로엔자 슐러가 노출된 까닭에 이제는 명품백 좀 안다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브랜드가 되어 버렸다.  루이비통, 프라다, 샤넬이 지친다는 사람들에게는 단비가 되었고, 명품 가방을 이제 한 번 사볼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저곳 활용도가 높은 백이 되었다.

[직장에서도, 파티에서도, 어느 자리에서도 세련되고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프로엔자 슐러]

[비비드한 컬러도 톤 다운된 컬러도 넘치거나 모자람없이 표현하는 프로엔자 슐러]

[뉴요커의 시크함과 밀라니즈의 세련된 공기를 불어넣은 프로엔자 슐러]

하지만, 무엇보다 프로엔자 슐러에 대해 지면을 빌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모두가 가지는 판초백(PS1)에 대한 기대나 엣지 때문이 아니다.  내가 프로엔자 슐러를 언급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의상들이다.  프로엔자 슐러의 의상들은 어느 컬렉션이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 지점에서 의상들을 선보인다.  아무리 RTW라고 하더라도 디자이너의 패기든 장난스러움이든 자신의 한 부분이라도 더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프로엔자 슐러는 절대 그런 의상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RTW가 가지는 입고 다닐 수 있는 속성에 매우 충실하다.  그러면서도 재킷, 팬츠, 셔츠, 니트, 백 모두가 디테일이 충분히 살아있다.  컬러에서도 톤 다운된 컬러는 그 컬러대로 비비드한 컬러는 그 컬러대로 각 아이템에 맞게 무겁지 않으면서 가볍게 보이지 않을 컬러를 제대로 잘 섞어낸다.  내가 프로엔자 슐러를 보면서 놀라고 감탄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뉴욕 공방의 어딘가에서 밀라노의 감성을 가져다 뉴요커의 시크함과 밀란니즈의 세련된 공기를 불어넣은 느낌이다.  프로엔자 슐러의 이름의 느낌 그대로 옷의 감성도 그에 딱 맞게 정말 감탄하게 만든다.  우리가 주목 해야할 것은 판초 백이 아니라 이 듀오의 옷들이다.  이들의 행보를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쉽사리 패션 위크에서 사라질 인물들이 아니다.  패션 사업에서 벌어 들인 돈을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날려 먹지 않는 이상.  패션 사업에 투자를 할 자금이 있다면 1순위로 프로엔자 슐러에 하고싶다.

[뉴욕 매디슨가 822번지에 위치한 프로엔자 슐러의 매장 윈도우]

[프로엔자 슐러의 매장 내부]

프로엔자 슐러의 의상들은 바니스 뉴욕, 버그도프 굿맨, 하비 니콜스, 콜레트 등을 통해서 유통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컬렉티드 숍을 통해서 조금씩 의상이 들어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들의 컬렉션을 제대로 보기는 힘들다.  아직 한국에 프로엔자 슐러 의상에 대한 기호가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은듯하다.  프로엔자 슐러의 진가는 판초백이 아니라 이들의 의상이니 앞으로는 한국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프로엔자 슐러의 매장을 직접 방문하고 싶은 분들은 뉴욕 매디슨 애비뉴 822번지를 찾아가면 된다. 이탈리아에 돌체&가바나가 있다면, 네덜란드에는 빅터&롤프가 있고, 뉴욕에는 프로엔자 슐러가 있다.  프로엔자 슐러의 선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