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피카비아는 뒤샹과 항상 같이 언급되는 작가다.  그는 인상주의로 시작해서 입체주의, 오르피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까지 아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이쯤되면 반응은 두 가지다.  정체성이 없는건지 이리저리 많이도 옮겨다녔군. or 이렇게 다양하게 이 많은 걸 했단 말이야! 대단하군.  나는 이 두 반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내가 본 피카비아는 전위적인 작품세계라고 보이기 보다는 그냥 쓸쓸해 보였다.  초기 작품에서 다다이즘에 이를수록 쓸쓸함이 더해갔다.  피카비아의 작품은 다다에서 전성기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기계에 심취해 기계로 사랑과 성을 이야기 한 작품들은 별 감흥이 없었다.  뒤샹처럼 거침없는 것도 아니고, 만 레이처럼 변태스럽지도 않으며, 스티클리츠처럼 지적이지도 못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그의 작품속에서는 맥없이 펼쳐지는 기계들의 향연속에 그는 항상 에로티시즘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기계를 가지고도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다니!

프란시스 피카비아
<사랑의 퍼레이드> 1917. 여성과 남성은 혼합한 에로틱한 내용을 전달했다고 한다. 어딜봐서 그렇다는 건지. 설명이 빠지면 그냥 기계를 풍자한 캐리커쳐같다.
프란시스 피카비아2
<양귀비와 두 여인들> 1941. 피카비아의 거침없는 표현이 멋지다. 바로크적인 극적대비도 멋지고, 그로테스크한 여인네들의 누드도 멋지다.

어쩌면 이 양반 작업실 한 귀퉁이에는 기계가 아닌 사람을 주인공으로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측이 맞았다.  피카비아는 1940년대로 들어서면서 플레이보이에 나올만한 사진들을 가지고 키치적인 회화작품에 몰두한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쓸쓸하거나 부족하거나 룸펜의 쪼잔한 성적판타지를 그려내고 있지 않는다.  모델은 하나같이 육감적이고 동성애도 거침없이 다루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거침없이 만들었을까?  흥미로운건 다다이즘 시기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갤러리나 뮤지엄 소장인데, 야한 누드그림들은 모두 개인소장이라는 점이다.  크게 투자가치가 있으면 모를까 기계를 빙자한 룸펜의 쪼잔한 성적판타지를 지켜볼 개인 소장가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피카비아는 어쩌면 한 시기에 중요한 자리를 해주었고 인정도 받았는데 굳이 전위를 일삼을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인생 말년은 누가 손가락직을 하던(많은 비평가들이 그랬다.) 피카비아는 행복했을 것이다.  피카비아를 지켜 본 나도 쓸쓸한 다다보다는 열정의 찬 야한 그림들이 더 좋고 행복했다.  어떤 예술 활동이든 자신을 까발리지 않고는 누구도 감동하지 않는다.

 

추석의 긴 휴가가 끝나고 일상에 돌아온 오늘은 힘에 겹기만 하다.  거리에 차는 한산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껏 지쳐보인다.  놀다가 일하는 것만큼 죽을맛도 없긴하지.  오전엔 다방커피로 시작을 하고 정신을 차릴 예정이었지만 자판기 커피보다 카페인이 부족했고, 오후엔 일에 집중할 예정이었지만 날씨는 너무 더웠다.  결국 저녁에 되어서야 자판을 두드려 대고 있다.  아… 다시 올빼미 생활로 돌아가려나보다.  올빼미가 지식의 상징이기는 하나 올빼미처럼 밤을 밝히는 짓은 인간이 할 것이 못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축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2
존 싱어 싸전트의 그림이 생각나는 베르메르의 그림. 인상파의 시초는 어쩌면 베르메르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몽롱한 정신에서 뽑아들은 베르메르의 화집.  바닥에 먼지들을 보며 누워있다가 손에 닿은 것이 베르메르 화집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림이 겨우 36점에 불과하고 그의 생애에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지만 마음을 홀딱 뺏어가는데는 그리 많은 그림이 필요없는 작가다. 네덜란드가 부국의 정점으로 치달은 바로크 시기에 활동했던만큼 그림들도 하나같이 풍성하다. 네덜란드의 바로크 시기는 신교를 받아들이고 부의 중심이 부르주아들에게 있었기에 종교화보다는 장르화가 더 많이 남아 있다.  신흥 부르주아들이 원한던 것은 그들의 삶을 그대로 그려내기를 원했으니까.  피터 데 호흐, 렘브란트, 루벤스의 그림들도 많은 이야기와 영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베르메르의 그림들처럼 매혹적이는 않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찰하고 또 관찰해 촘촘하고 계산된 그림들을 그리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구도를 잡아내는 것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아주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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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너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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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여신 클리오와 함께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뒷모습

영화로도 만들어진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자꾸만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오늘의 몽롱했던 정신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어주는 재주를 지닌 그림이다.  그런데도 어느순간 정신이 번쩍든다.  “어떻게 이렇게 과감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움 때문이다.  진주 귀걸이와 입술에 과감에 찍은 하얀 물감 덩어리는 소녀를 더욱 생기있게 해주는 화룡점정의 역할을 한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만큼 볼수록 감탄하게 되는 그림도 몇 없는것 같다.  오늘 오후는 종일 바닥에 누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만 바라봤다. 마음이 뿌듯해진다.  친구 중에 이제서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깨달았다며 한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의 하고 싶은 일은 유유자적과 무위도식.  난 이 두가지가 좋기는 해도 나를 부릉부릉하고 시동을 걸어줄 엔진이 없으면 슬슬 화가나기 시작한다.  유유자적과 무위도식도 아무나 하는건 아닌가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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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  델프트에서 나고자라 이곳을 떠난적이 없는 베르베르.  하늘의 먹구름이 성당을 더욱 빛나 보이게 한다.

월요일을 베르메르와 시작했으니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내 마음속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대기 시작할거다.  오늘 한 가지 깨달은건 역사에 요란하게 등장한 르네상스보다 어지러운 세상에 탄생한 바로크의 저력이 정말 크다는거다.  서양의 미술사는 르네상스의 등장에 가려져 다른 시대의 것들이 저평가 되어 보인다는 것이 안타깝다.  예쁜 라파엘로, 매력적인 보티첼의 그림들이 내게 주는 위안을 주었지만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만큼 후광이 찬란하지는 못했다.  바로크가 가지는 집중력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직접보면 또 넋을 잃겠지?  네버엔딩 스토리 마냥 바닥에 널려진 땅콩처럼 바닥의 굴러다닐때 바로크의 화집을 손에 끼고 바라보는 것도 정신나간 휴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나쁘지 않은 듯하다.  추석휴가의 끝은 바로크와 함께 날려버렸다.  내일도 정신이 몽롱한 분들이 있다면 바로크 화집 아무거나 들고 멍하니 바라보기를 추천한다.  처음에 같이 몽롱해지다가 어느 시점에 각성효과가 번쩍 나타난다.

 

크리미널 마인드
앵그르의 그림에는 왠지 모를 섬뜩함이 있다.  대산과 거리를 두고 즐긴다는 느낌 그것 때문일까?

들여다 본다는 것은 자신과의 그 대상의 거리를 두고 즐긴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나에겐 일어나지 않은 일이거나 일어나기 힘든 일일때는 더욱 열심히 들여다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드라마와 영화를 들여다 보는 것일테다.  특히 수사물일 때는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워가며 보게된다.  수사물의 플롯을 따라가면서 보더라도 잠시 멈추기를 해도 되고, 몰입도를 높여서 끝까지 봐버려도 어떻게 봐도 된다.  어차피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사실을 바탕으로 각본이 짜인다고 하더라도 감정이입을 높이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과 허구의 사이 어디 즈음에서 우리는 들여다 보기를 한다.  그게 수사물의 매력이다.

보스

시리즈 수사물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미국엔 CSI와 크리미널 마인드가, 일본엔 스트로베리 나이트와 보스가, 우리나라엔 수사반장과 TEN(텐)이 있다.  이외의 다른 나라에도 수사물은 넘치고 또 넘칠거다.  여러 수사물을 섭렵한 결과 위에 언급한 것들이 그래도 가장 흥미진진한 시리즈 수사물인듯하다.  방학숙제 대신 셜록홈즈부터 섭렵한 때부터 지금까지 봐온 수사물을 통틀어 대표 시리즈 수사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건 순전히 내 영혼의 닭고기수프이기 때문에 다른것이 대표 시리즈 수사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 주관적인 시리즈 수사물에 대한 느낌과 평가표니까.  우리가 흔히 줄여서 부르는 미드, 일드, 한드에는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수사물을 보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야하기 때문에 그 나라 관객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플롯을 보여준다.  시리즈물들은 현지 그 나라의 관객을 1차적인 타겟으로 하기때문에 그렇다.  관심을 가지고 시리즈 수사물을 들여다 보면 외국으로 여행이나 유학을 갈 때 해당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로앤오더

우선 시리즈 수사물의 붐을 이끌어 온 미국 드라마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 시리즈 수사물의 특징은 수사국의 체계가 상당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전체적인 플롯이 매우 잘 짜여져 있고 그안에서 각 인물들은 그 캐릭터에 맞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내 비춘다.  수사국 계층간의 체계가 수직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맡아서 해야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정확히 분할되어 있다.  매뉴얼의 나라인만큼 매뉴얼대로 일사분란하게 일이 잘 움직인다.  하지만 수사국 전체가 체계적이라고 하더라도 권위적인 상사에 복종한다거나 한사람을 정점으로 수사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할 일이 나뉘어지고, 자신의 분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해결점을 찾아서 나아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매우 긍정적인 사회인것처럼 보이지만 미드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회분위기가 법망을 피하고 이용해 일어나는 범죄들이 다반사이고, 존속살인, 연속살인, 연쇄살인, 성범죄 등이 난무한다.  겉으로 고요하고 무난한 일상을 가장하고, 각 경제지표들이 세계 최고의 부국이라고 말해주지만  미국 개개인들의 삶은 고단하고 험난하다.  미국인들이 구매하는 모든것들은 은행의 빚으로 주택, 자동차, 교육비를 감당하고 있어서  만일 당장 직장에서 쫓겨나면 바로 파산의 절차를 밟게되는 경우가 일쌍다반사다.  매뉴얼에 따라 착착 일이 진행되지만 매뉴얼에서 벗어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순간 각종 사기와 범죄가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개개인의 점들이 모여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며 이를 벗어난 시스템에서는 통제를 못하게 된다.  매뉴얼이 자본주의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수록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욱 많이 생기기 마련이고 범죄는 더 성행한다.  미국의 범죄심리학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것도 이해가 충분히 되는 대목이다.  재미난건 이 통제불가능한 범죄가 발생하면 우습게도 매뉴얼에 따라 유능한 수사팀이 일사분란하게 자기몫을 해낸다는 것이다.  100%의 능력을 가진 1%가 99%의 능력을 가진 99%를 이끌어간다는 미국 엘리트주의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드의 시리즈 수사물이 빛이 나는 대목은 수사물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이 한 작품에 매달려 각 에피소드를 만들어갈 뿐더러 한 편당 수억이상의 자본을 투입하는데 있다.  CSI에 매편 등장하는 시체 더미도 매우 리얼하고, 배우들이 10년씩 바뀌지 않으며, 신종범죄를 최신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본의 힘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자본이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자본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미드 수사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에피소드를 아주 많이 양산해낸다.

 

앵그르1

두번째는 일본 시리즈 수사물을 들여다 볼 차례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또 다른 점이 수없이 많은 나라다.  사회분위기가 권위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눈에 띄게 존경을 표하거나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 점에서 다르다.  일본사회에서 용인하는 사회적으로 올바른 인간상에 대한 범위가 매우 협소하고 엄격해 개개인의 긴장도가 매우높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긴장도가 매우 높은 인물로 그려진다.  이 부분은 범죄자도 수사국 사람들도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사건이 해결되기전에 매스컴을 타게 될 처지에 처하게 되면 미드에서는 수사국의 높은 자리가 고민은 하지만 전전긍긍은 안한다.  그러나 일들에서는 수사국의 높은 자리를 꿰찬 인물들도 여지없이 긴장도가 높아 난리법석을 떤다. 이럴때 미드나 한드는 수위높은 욕지거리를 하고 대책을 세울텐데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올바른 인간상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매우 거침없고 자신만만하게 그려져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협소하고 엄격한 룰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사회적으로 그들은 그러니까라고 용인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일본의 수사국은 매우 경직되어 있고 한 사람이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일드 보스의 여주인공은 기골이 장대하고(다른 일본인들에 비해), 목소리나 어투도 상당히 남성스럽다.  그녀는 매우 카리스마 있으며 냉철하고 리더십에 부하까지 잘 챙기는 능력자로 그려진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일드는 숨막히게 조여오는 올바른 인간사회를 보여주기는 하는데 각 인물을 캐릭터화해서 극의 흐름이 늘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에피소드에 한 번씩 자신이 허당인것을 보여주고, 각 캐릭터도 특정적으로 지어져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머리나는 육모제에 집착하는 형사, 잘생긴 남자의 손짓 하나에 호들갑 떠는 게이형사, 잘생긴거 하나로 무게잡는 별볼이 없는 형사까지 각 캐릭터들은 고유의 특징을 넘어서 오타쿠적인 냄새를 향기짙게 낸다.  그래서 숨막히고 경직되어 있는 일본사회를 조금은 말랑하게 그려내는 노력을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일드에서 가끔 어처구니 없는 꽁트나 위트를 보이는건 이 때문이다.  일드와 미드의 공통점은 매뉴얼에 따라 사건해결을 한다는 것인데, 사회의 매뉴얼을 잘 따르는 일본인들의 범죄를 비교적 일사천리로 그럴싸하게 그려낸다.  또한 각 팀내에서 쓸데없는 연애질을 그리지 않는 것도 미드와 매우 유사하다.  이런 탓인지 일들의 수사물이 어딘가 경직되어 있지만 숨쉴만하고, 수사물로 보여지는 것도 이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의 시리즈물들은 미국의 시리즈물들과 달리 배우들과 다년간 계약을 하지는 않지만, 첫번째 시리즈에 등장한 인물들의 스케줄이 다 들어맞을때까지 기다렸다가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려서 같은 인물들이 다시 그 시리즈에 등장하게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는이로 하여금 뜬금없이 바뀐 주인공이 예전의 주인공이라고 주문을 걸 필요가 없다.  아마도 미드처럼 배우들의 인력풀이 탄탄하지도 않고, 겹치기 출연도 많이 까닭에 이런 시스템이 발달했다고 보여진다.

 

앵그르2

마지막으로는 한국 시리즈 수사물을 보겠다.  한국의 시리즈 수사물은 옛날옛날 한옛날에 했던 수사반장 이후로 OCN에서 했던 특수전담반 TEN이 유일하다.  TEN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시리즈 수사물을 장르화해 꼼꼼하게 다룬적이 없다.  CSI가 시즌 13을 내놓고, 크리미널 마인드가 시즌8을 내놓을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외화방영에만 열중했을 뿐이다.  시청률 싸움에서 미드 시리즈 수사물은 짭짤한 재미를 많이 봤을테니까.  시리즈 수사물 비슷한 무언가가 나오면 꼭 어줍잖은 로맨스가 끼어 있어서 참 짜증났던 기억이 많다.  대한민국에서 남녀관계는 로맨스를 엮지 않으면 시청률이 안나오는지 작가들은 지겹게도 로맨스를 엮어냈다.  한국사회는 일본보다는 사회적으로 올바른 인간상에 대한 범위가 비교적 넓고 널널한 편이지만, 조직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 사람들의 긴장도는 매우 높아진다.  한국에서는 조직이 주는 압박은 생각보다 강하지만, 자존심이라는 미명하에 보기보다 괜찮다는 아닌척을 매우 잘한다.  그래서 수사국의 많은 인물들이 조직의 윗선에서 내려오는 부당한 요구에 대해 뒤에서 욕을 할 지언정 부당하다고 윗선과 맞서거나 대들지 않는다.  에잇! 조직이라는게 그렇지 뭐 하며 그냥 따른다.  이점이 일드와 매우 비슷하다.  특수전담반 TEN은 미드의 과학수사와 일드의 캐릭터를 곧잘 버무려서 내놓았다.  한드 수사물은 미드와 일드의 양쪽 모두를 적절하게 잘 버무려 놓았다.  촘촘한 플롯을 가지고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에피소드는 미드를 닮았고, 조직의 경직성과 어쩔 수없이 따라야 하는 부당한 룰에 대한 일정한 포기는 일드를 닮았다.  이 둘을 잘 버무린 단점이라고 하면 사건 중심이어서 흥미진진하지만, 명확한 캐릭터 중심점을 아직 잘 잡지 못해서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 많이 든다는 거다.  한 예로, 특수전담반 TEN에서는 F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긴장감이 백배가 되서 한국에서 큰일 하나 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즌2로 넘어와서 F사건이 일단락 되니까 팀장 여지훈의 캐릭터는 갈 곳을 잃었고, 남예리는 들러리로 전락했다.  그나마 섬세하고 계산된 연기로 백독사와 소 뒷걸음치다 개구리 잡는 박민호가 시즌2를 이끌어갔다.  사건 중심으로 가야 캐릭터가 사는데 사건을 해결해 버리고 나니 캐릭터가 갈 곳을 잃은 겪이다.  그나마 어줍잖은 로맨스를 안넣어서 한국의 시리즈 수사물중에는 최고로 칠만했다.  수사물에서 질척이는 로맨스는 진짜 누구에게나 민폐다.  한국에서는 수사전담반 TEN이 유일하게 진정한 시즌 드라마가 되었다.  주요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고 사건도 이어가는 진정한 시즌 드라마.  드디어 한국에도 시리즈 수사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은 꼼꼼한 매뉴얼로 시스템을 막아내는 사회도 아니고, 사회적 긴장도를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나라도 아니다.  우리만의 적절한 제작시스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미국처럼 배우의 인력풀, 자본, 미디어를 가지도 못했고, 일본처럼 배우들의 스케줄을 조절해가며 시즌제를 만들어낼만큼 꼼꼼함도 갖추지 못했다.  대충 밑그림 그려서 쪽대본에 의지해 이해할 수 없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은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겨우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화가나게 만들려나?  이제 출발선을 조금 벗어난 한국의 시리즈 수사물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렇게라도 시작을 해준 OCN 제작자와 TEN 작가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처음이 어렵지 계속 묵묵히 갈길을 가다보면 오히려 미국에 TEN을 수출할지 누가 알겠냐고.

 

스페인 여행은 호불호가 갈린다.  푹푹찌는 날씨와 어디를 가도 통하지 않는 영어.  참을만한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사이에서.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가운데 다시는 스페인을 오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프라도 미술관을 가보기 전까지는.  여행을 한 후에는 안좋은 기억이 저멀리 사라지는건 사실이지만, 프라도 미술관 하나 때문에 스페인을 다시 가야겠다고 분기탱천한 나를 볼 때마다  역시 사람은 망각이라는 좋은 장치를 머리에 탑재하고 산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프라도의 매력을 배가되게 해주는 것은

첫째, 지하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더워서 죽을 지경인데 한참을 씩씩거리고 걸어야 미술관이 비로소 보인다.  그래서 꼭 내가 이 미술관의 그림을 모두 보고 말리라라는 오기와  뭐 얼마나 좋다고 이 고생을 시키냐는 욱!함이 동시에 밀려든다.  그탓에 미술관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둘째, 기념품샵의 기념품들이 멋지다.  프라도미술관의 기념품들은 오래도록 소장하고 싶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프라도는 정성들여 내놓은 기념품들이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좋은 기억을 가지게 해주는 매개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프라도에게 영악하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  기념품은 기념할 수 있어야 하는 속성을 반드시 지녀야 한다.  조악한 수입엽서 따위를 쌓아놓고 구매를 부추기려는 알량한 미술관들이 꼭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프라도 미술관
보는 순간 빨려드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보는 순간 울컥했던 그림은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후로 처음이다.

세째, 소장품들이 주옥같다.  꼭 봐야할 작품들이 적당한 크기의 공간에 촘촘하게 걸려있는 곳이 프라도다.  보슈의 풍속화, 뒤러의 자화상, 티치아노의 비너스와 아도니스, 엘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세례,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 고야의 옷을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도판으로만 보기에는 갈증이 나는 명작들이 한 곳에서 원샷으로 달려드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프라도를 둘러보고 나오면 눈과 마음이 보약을 먹은듯이 든든해지는건 인지상정이다.

한가지 마음에 걸린게 있다면 이 명작들이 잉카에서 훔쳐온 황금으로 사들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우린 잉카의 후예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저 나의 빵빵한 상상력에 비롯된 넋두리일 뿐이다. ^^*  뻔한 이야기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기회가 되면 꼭 프라도를 가봤으면 좋겠다.  혹 스페인에서 건질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더라도(그럴리는 없겠지만) 프라도를 보고나면 스페인에 뭐가 많구나 하는 생각을 꼭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 12유로에 그 많은 감동을 어디에서 구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니 꼭 반드시 프라도는 가봐라.

 

세상끝에서 발버둥쳐서 겨우 올라왔지만 주류세계에는 여전히 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  수사물이 항상 그렇지만 가정을 이루고 사는 수사물의 주인공들은 일중독과 애정결핍의 사이를 애타게 오고간다.

미국 드라마 “The Killing”(이하 더킬링)은 다른 수사물과는 다르게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2개의 시즌을 할애한다.  드라마의 주된 흐름은 시애틀에 사는 로지 라슨이라는 소녀를 과연 누가 죽였는가이다.  그리고 형사 새라와 스티븐이 목숨걸고 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친다.  간단한 스토리다.   그런데 그 간단한 스토리안에서 등장인물에 가슴아플만큼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더킬링의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당신도 그렇다”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인 새라와 스티븐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결핍이 있다.  새라는 엄마에게 버림받고 입양가족을 전전했고, 스티븐은 부모없이 누나가 뒷바라지를 했다.  그래서 이들은 누구보다 사건사고를 예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거침이 없다.   눈치보고 학대받은 이들의 가슴아픈 장점들이다.

더 킬링
The Killing의 분위기와 너무 흡사한 모딜리아니의 그림.  주인공 사라는 절대 미국 사람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조크 한 번 안 날리고 시즌2를 소화하는가 말이다!

 

작가가 영악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대목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고 하는 새라의 삶에서 남자친구와 아들을 떼어놓고, 평범한 일상을 가지려고 하는 스티븐의 삶에서 아무도 곁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는 점이다.  그렇게해서 이들을 사건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애정결핍을 그들이 가져야할 숙명처럼 그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야멸차게 세겨넣는다.  풀지못할 숙제와 사건은 그래야만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애정결핍을 신화의 전형적인 영웅키우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요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기 위한 가장 효과좋은 채찍질이 되기도 한다.  현대인이 가여운 이유다.  The Killing은 로지 라슨의 죽음을 빙자해 자신의 심연을 한 발짝 더 들여다 보게하는 드라마다.  그 심연에서 건져지는 것들은 궁금하지만 겁나고, 좋아질거라고 되뇌어보지만 그렇게 될리 없는 현실감 따위의 것들이다.

* The Killing의 작가가 누군지 찾아보니 드라마 Cold Case의 대본을 쓴 작가다.  Cold Case에서는 그래도 늘어진 팬티 고무줄같은 희망의 메세지라도 날려줬었는데, The Killing은 작정하고 독하고 드라이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 Veena Sud는 NYU에서 Film and Television을 전공했다. The Killing은 덴마크 드라마 Forbrydelsen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