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성마테오의 소명. 누가 마테냐는 것이 논란이 되어 수많은 논문을 쓰게 만든 그의 작품.]

그림을 함께 하다보면 특별하게 아끼게 되는 작가와 작품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각 시대별로 사조별로 좋아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이 무수히 많지만 특히 좋아하는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크시대의 작품들이다.  그림실력이 좋은 천재들이 포진을 하고 있던 르네상스를 거쳐 지루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했던 매너리즘을 지나 탄생한 바로크.  극적이다 못해 비장하기까지한 바로크의 그림들과 조각들을 볼 때면 가슴속에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진다.  감동받아서 그러냐고 하면 물론이다.  그런데 바로크의 것들은 감동 이상의 것들이 존재한다.  저걸 정말 사람들이 그리고 만들었을까하는 의구심과 정말 만들었다는 근거를 마주했을 때의 놀라움.  그런것들이 존재한다.  인간의 뒤틀린 그리고 마음 저 깊은 곳에 움튼 감정들을 과감하게 토해내는 바로크 안에 있을 때면 잠깐은 과호흡도 하고 숨을 멈추기도 한다.  내게 바로크는 그런 존재다.

[네덜란드 바로크의 정수를 보여주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와 베르니니, 보로미니, 프랑스의 푸생과 로랭,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루벤스와 베르메르, 영국의 반다이크.  이들이 바로크를 이끌었던 거장들이다.  우와! 멋지다! 잘했다! 라는 말을 한 번 쯤은 해봤을 만한 작품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바로크는 미술사에 있어서 참 축복받았던 시기였다.  정교하게 짜여지고 효율적인 르네상스와 달리 작가 자신들의 번뜩이는 생각들과 마음을 담아서 작품에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실점이 좀 맞지 않아도,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해도, 그리스.로마신화를 한없이 차용해서 그려도 모든 것이 수용되던 그런때 였기 때문이다.  바로크의 표현방법은 매우 극적이어서 그림에서는 무대공연을 보는 듯하고, 조각이나 건축은 불쑥 튀어나오고 들어가기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한다.

[클로드 로랭의 그림을 보면 베네치아에서 그림공부를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다.]
[클로드 로랭의 그림을 보면 베네치아에서 그림공부를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다.]

바로크와 로코코는 자주 비교되는 대상이다.  바로크에 이어 바로 로코코가 이어지는데 바로크는 상당히 남성적이고 로코코는 지극히 여성적인 취향일 탓이다.  바로크는 절대왕정이 존재하던 중앙집권의 시기였다.  모든게 남성중심이었고 왕중심이었고 후원자도 남성이었다.  그래서 거대하고 극적이고 마초적이며 감정의 기복을 더욱 심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크다.  바로크가 끝나는 시기도 프랑스의 루이14세가 죽은 그 해를 기점으로한다.  이탈리아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프랑스는 루이 14세를 기점으로 문화대국으로 일어선다.  프랑스의 미(美)의 기준을 정하고 파리를 정비하고 베르사유로 궁을 옮기고 처음으로 쇼핑문화를 일으킨 시기였다.  이탈리아에 대적할만한 명품이 탄생한 시기가 루이 14세 부터이니 프랑스 명품의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다.  이야기가 잠시 프랑스로 흘렀는데 실은 이탈리아의 카라바조를 더 이야기 해야한다. 바로크를 통틀어 카라바조를 대적할 자는 없기 때문이다.

[우피치에서 카라바조를 모두 대여중여서 메두사만을 보았는데도 소름끼치게 좋았던 카라바지오.]
[우피치에서 카라바조를 모두 대여중여서 메두사만을 보았는데도 소름끼치게 좋았던 카라바지오.]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집안의 배경이나 누군가의 후원이 많지 않아 평생을 힘들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작가다.  르네상스에서 보여준 촘촘한 풍경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등장인물을 앞으로 집중시켜 연극적인 연출을 한 것이다.  카라바조의 디오니소스, 엠마오의 그리스도, 성마테오의 소명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극을 연출했다면 이렇게 했겠지라는 것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뒷배경을 어둡게 인물들은 더욱 돋보이게 한 그의 표현력은 유럽 바로크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바로크시대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카라바조의 이런 표현력을 따라하고 존경했다.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벨라스케스도 베르메르도 그렇게 매력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온갖 사고는 다 치고 결국 살인까지 했던 카라바조의 인생은 험난 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바로크 전체의 웅장함과 요동치는 사람의 마음을 예술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그리니 더이상 할 게 없다고 할만도 한 라파엘로의 그림. 그래도 새로운 물결은 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그리니 더이상 할 게 없다고 할만도 한 라파엘로의 그림. 그래도 새로운 물결은 오기 마련이다.]

라파엘로 이후 더 이상은 할 것이 없다고 여겨졌던 매너리즘 시기에는 거대한 바로크의 물결이 올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절대 올 것 같지 않은 암흑기여도 반드시 빛이나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현대미술이 더이상 갈 곳이 없고 할 건 다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무던히 시도하고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현대미술은 매너리즘 비슷한 무엇으로 불릴테고 어느 시점엔 바로크에 필적한 것이 나올 것이다.  별 생각 없어 보인다고 별 것 아닌 것을 한다고 현대미술을 폄하하지 말고 새로운 물결이 오는 전조로 생각하면 좋겠다.  우리가 바로크를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세비야에 대한 기억은 흐드러지게 핀 강변의 열대 꽃, 40도에 가까운 열, 그리고 플라맹고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를 보겠다고 어찌나 쏘다녔던지 저녁이 되면 범고래가 먹을양을 먹어치웠다. 게다가 밤에는 하루종일 꺼지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쓰고 잤는데도 정말 이가 덜덜거릴만큼 추웠다. 이렇게 바르셀로나에서 힘을 몽창 빼고서 세비야에 왔으니 아플 수밖에…

세비야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컸다. 캉캉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플랑맹코의 무희들, 카르멘이 배경이 된 담배공장, 열대과일들. 그러나 상상하는만큼 실망스러운건 여행만한게 없다고 했던가. 기대가 지나쳤는지 몸도 지치고 세비야도 그저 그랬다. 몸이 지쳤으니 세비야가 그저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세비야에서 먹었던 KFC와 버거킹밖에 없었다. 어디 맛집을 돌아다녀도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음식들이 하나같이 짜기만 했다. 카르멘이 배경이 된 세비야 대학교의 담배공장 건물을 보고서도 으음 그렇군. 그 유명한 에스파냐 광장을 보고도 아… 타일과 건물이 멋지군. 이런 정도 였으니 세비야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탓이리라.

그래도 세비야의 호텔은 별4개 짜리여서 시설도 너무 좋았고, 영어가 원활하게 소통되는 스태프들도 많아서 그나마 위로 되었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니 세비야 어딜가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바르셀로나는 그나마 프랑스어가 통해서 다니기 편했는데 세비야는 그런게 통하지가 않았다. 이렇게 불만 가득 한다발을 내려놓을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여행자로서의 예의가 아니라고. 편협한 생각으로 한 도시를 평가하는건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약국으로가서 감기약을 얻어먹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텔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스 정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있지 않은가! 별도 몇개 붙어있고 사람도 많은걸보니 좋은 식당인가보다. 볼 것도 없이 추천받은 음식 몇 개를 시켜놓고 푸짐하게 이것저것 먹기 시작했다. 오호! 맛있는데. 그리스음식이 이런거구나. 역시 잘 먹으니까 세상이 달라보인다. 세비야의 이틀째는 세비야의 음식이 아닌 그리스음식으로 시작했다.

그리스음식으로 분기탱천해서 세비야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리고 저녁무렵에는 아직도 눈에 선명한 플라맹코 춤을 보았다. 호텔스태프의 추천으로 가게된 플라맹고 극장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한 감동을 준다. 플라맹코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그저 집시들이 추는 춤 쯤으로만 여기고 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까혼, 기타, 박수에 맞춰 악보도 없이 구슬프게 울며 노래하는 남자가수를 배경으로 여성무희는 춤을 춘다. 발 놀림도, 드레스의 흐느적임도, 힘을 주는 팔의 움직임도 사실은 너무 구슬프다. 플라맹코는 신나는 춤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한과 혼을 풀어내는 살풀이 같았다. 여전히 열이 내리지 않아서 약을 먹어가며 봤던 플라맹코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 저 한구석에서 먹먹함으로 자리잡고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탱고와 플라맹코를 비슷하겠거니 하고 덤벼들어봤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바르셀로나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그라나다처럼 찐한 풍경을 선사하지 않아도 세비야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플라맹코는 그렇게 또 수백년을 이어가겠지? 조용하고 차분한 세비야의 낮에 실망하지 말아라. 깜깜한 저녁 플라맹코를 보고나면 나처럼 생각이 확 달라질거다. 다음에 세비야를 또 가게되면 낮에는 느긋하게 낮잠이나 자다가 저녁에 플라맹코만 보고 올거다. 충분히 그래도 될만큼 플라맹코는 매력적이고 가슴 찐한 감동을 준다.

런던을 갈 때면 거의 항상 빼놓지 않고 가는 곳. 코톨드 미술관. 런던의 코톨드 미술관은 다른 런던의 미술관에 비해 그 규모가 참 소박하다. 사립미술관이어서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을 해야하는데 그 입장료는 생각도 안날만큼 아주 멋진 컬렉션을 갖고 있는 곳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영국에서 운영하는 국영미술관은 모두 무료이기 때문에, 간혹 ‘내가 꼭 돈 들여서 코톨드를 가야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다. 코톨드를 가보고 난 후에는 이런 무식한 이야기는 안할거라고 기대한다.

내가 코톨드 미술관을 좋아라하는 이유는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 있어서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앞에앉아서 처량한 여인의 눈빛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머리속에 잡념이 다 사라진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슬프지만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화려한, 내일에 대한 기약이 없지만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한 여인을 보여준다. 복잡한 일이 많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는 시간을 꼭 내서 가는 곳 코톨트 미술관. 나의 이 작은 안식처에 1년동안 무려 20만명이 다녀간단다.

코톨드 미술관이 매력적인건 파리까지 가지 않아도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그림의 정수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갖다온 사람이라면 코톨드에서 좀더 여유있게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그림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코톨드의 진가는 반드시 오르세를 다녀 온 후에야 빛을 발하니 코톨드 보다는 오르세부터 다녀왔으면 한다. 이곳의 그림들은 19-20세기에 걸쳐 미술 애호가들의 기부를 통해서 컬렉션이 완성되었다. 그림은 대략 250점 정도 된다고 한다. 코톨드에서는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이외에도 모딜리아니, 르누아르, 쇠라, 로트렉, 세잔, 고갱 등의 그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독일의 인상파라고 불리는 청기사파의 컬렉션도 같이 있어서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코톨드 미술관의 또 하나의 자랑은 코톨드 미술연구소(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코톨드는 미술사를 비롯해 여러 전공들을 제공하고 있는 세계적인 미술연구소 학교다. BBC를 보면 미술관련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코톨드 출신인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작가가 써준 스크립트를 그냥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진심에서 우러난 방송을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만큼 코톨드 학교의 수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수준 이상이라는 이야기다. 코톨드 미술연구소는 입학도 어렵고 졸업도 어려운 학교로 유명하다.

코톨드는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미술관이다. 기념품숍도 아주 세련되고, 미술관안에 있는 레스토랑의 점심도 아주 맛있다. 미술관 안쪽은 중정으로 된 옛건물들이 감싸고 있어서 차 한 잔 마시고 느긋하게 돌아다니기도 여유롭고 좋다.매년가는 런던이지만 내년의 코톨드는 어떤 느낌일까 사뭇기대된다.

항상 그렇지만 여행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별로없다. 아무리 길을 찾아보고 여행일정을 짜더라도 기어코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숙소에서 테이트 모던까지 가는 버스노선을 프린트를 해놓고서 떡하니 튜브를 타고서 길을 헤맸다. 더욱이 쥬빌리 라인의 본드 스트리트역이 공사중이라서 제대로 튜브를 갈아타지도 못했다. 어쩐지 테이트 모던 이전까지 착착 계획대로 된다 싶었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는 크게 원래 가지고 있는 컬렉션과 앙리 마티스의 Cut-Out 전, 리차드 해밀턴 전 이렇게 세 가지였다. 내가 테이트 모던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박하다.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의 경치가 너무 좋다는 것과 그림을 보다가 지쳤을 때 널부러질 수 있는 소파가 아주 푹신하다는 것. 힘들면 가끔 잠도 잔다. 테이트 모던의 크기는 얼추 잡아 파리의 오르세와 비슷하다. 자체 컬렉션이 널널해 오르세보다는 전투적으로 보아도 된다는 부담감이 없다.  이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다.

갈 때마다 다르지만 테이트 모던 자체의 컬렉션 중에 가장 오랫동안 벅찬마음으로 보았던 것이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은 조각이었다. 브랑쿠시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테이트 모던에 있는 것은 정말 작고 그다지 알려진 것도 아닌데도 그 울림이 컸다. 피카소, 데키리코, 달리의 그림들보다 브랑쿠시가 더 기억에 남는걸 보면 브랑쿠시의 아우라가 정말 큰게 아닌가 생각된다.

리차드 해밀턴은 팝아트의 창시자로 일컫어진다. 하지만,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앤디 워홀에 비해 너무 일찍이 팝아트를 빠져나왔고, 오랜시간 작업을 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도 많이 변했다. 리차드 해밀턴을 팝아트로 국한 시키기에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이라곤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팝아트의 시초 작품만 본 탓에 그에 대한 기대치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통틀어 여러작품을 둘러보니 테이트 모던이 왜 리차드 해밀턴을 불러들였는지를 알만한 대목들이 꽤 있었다. 뒤샹의 <Large Glass>에 대한 오마주, 믹 재거의 마약사건에 대한 실크 스크린, 마네의 올랭피아를 살짝 비튼 위트감. 기대치보다 흥미로웠고, 다시 보기 힘들 전시라는 생각에 테이트 모던이 고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4시간이나 기다려서 본 마티스의 Cut-Out 전시. 앙리 마티스의 컷아웃 전시는 마티스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시절 종이오리기로 작업을 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의 종이오리기 작업들을 보면 과연 이 양반이 관절염으로 고생한 것이 맞나? 할만큼 열정적이고 방대한 작업들에 입이 쩍 벌어진다. 엄청난 습작과 노트에 적어내려간 기록물들, 벽면을 모두 채우는 엄청난 크기의 종이 오리기 작업들, 스케치도 없이 쓱쓱 가위로 잘라내서 붙인 천재성과 열정. 마티스가 유명해서 작품이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매력적이어서 마티스가 유명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전시회다. 마티스의 종이오리기를 보다가 갑자기 얼마전에 본 역린의 중용 23장이 생각나더라.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그 구절. 휠체어에 앉아 하루종일 종이오리기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그림의 세계를 이어가던 마티스는 사람들에게 종이오리기로도 얼마든지 감동과 경외심을 갖게 했다. 타이푸드와 화이트 와인에 빠져서 런던의 4일을 보내기에는 너무 긴시간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테이트 모던. 선택은 꽤나 탁월했다.

런던에 갈 계획이 있는 디자인유학플러스+ 피플들이 있다면 이번에는 꼭 테이트 모던을 가봤으면 좋겠다. 작품도 좋고, 경치도 좋고, 커피맛도 좋고, 살 기념품도 은근 많다. ^^

멍하니 앉아 있을 때면 이따금 그라나다가 다시 가고싶어진다.  길었던 스페인여행 일정에서 그라나다는 단 1박2일. 그라나다를 스페인여행에 넣은 이유는 단 하나. 알람브라 궁전을 보기 위해서 였다. 내가 알고 있는 알람브라에 대한 정보는 나스르 왕조의 여름궁전이었다는 것과 나스르 왕국이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의 싸움에서 지고는 알람브라 궁전을 남겨두고 도망갔다는 것 뿐이었다. 나스르의 왕은 이 알람브라 궁전을 너무 아껴서 궁전을 두고 도망갈 때 많이 울었다고 한다. (직접 가보면 왜 울었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ㅜ.ㅜ)

감기몸살 옴팡들었던 세비야에서 지칠대로 지쳐서 그라나다에 입성했을 때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알람브라궁의 내부를 돌아본 소감은 이랬다. 사람많고, 덥고, 사진에서 본 그대로 군. 게다가 북아프리카를 돌고온 한 커플이 이런 말을 속삭이는거다. “야, 모로코하고 터키에서 본 궁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다 얘.” 이것들이! 아주 염장을 지른다. 알람브라 궁전 그거 하나보고 그라나다까지 왔는데…

그러나 여행은 역시 끝까지 해봐야 여행이 좋았다 아니다를 결정 짓는다는 걸 그라나다에서 새삼 깨달았다. 내용은 이렇다. 알람브라 궁전 투어에 실망하고서 누에바 광장을 배회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골목을 따라 위로만 올라가는 거다. 그래서 나도 별 생각없이 따라갔다. 그렇게 끝까지 골목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사람들이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는거다. 뭐지? 하고 보니 산 저편의 알람브라 궁전 전경이 턱하고 눈앞에 펼쳐진다. 가슴이 벅차다. 아무 생각이 안난다. 해가 저물고 궁전에 불이켜지고도 한 참을 제자리에서 알람브라 궁전을 바라본다. 그렇게 그라나다는 나에게 어퍼컷을 날렸다.

별 생각없이 따라 올라갔던 곳은 산 니콜라스 광장으로 이 광장에 올라서면 알람브라 궁전에 한 눈에 들어온다. 산 니콜라스 광장에서 바라 본 알람브라 궁전은 낮에는 철갑옷을 입은 모헨조다로 유적지처럼 보이고 밤에는 조명을 활짝 켜놓은 갤러리의 앞마당 같다. 매일같이 바라보아도 가슴벅차고 뿌듯하고 영원히 나의 것일것만 같던 알람브라 궁전을 나스르의 왕은 어떻게 두고 나왔을까? 사극처럼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며 울었겠지? 다음에 그라나다를 가게되면 산 니콜라스 광장앞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매일 알람브라 궁전을 바라볼 것이다. 프라도미술관 덕분에 스페인에 다시 가고 싶어졌고, 알람브라 궁전 덕분에 스페인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졌으니 스페인 여행은 좋았다 말하고 싶다. 꽃보다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