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초현실주의자.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

내가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를 알게 된 건 다시 그녀의 브랜드를 부활 시킨다는 어느 신문기사였다. BBC였는지 허핑턴 포스트 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용은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그렇게 패션계에서는 사라져서는 안되었다것과 그녀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했었는지를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브랜드의 부활이 기대된다는 것이었다. 발음하기도 힘든 그녀의 이름은 내게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왼쪽은 안나 윈투어가 멧갈라에 참석했을 때의 드레스. 스키아파렐리에 대한 윈투어의오마주.

한 동안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접하게 된 건 초현실주의를 들여다 볼 때였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후로 많은 작가들이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에 접근한 초현실주의. 야릇하게 무의식을 툭 건드리는 것도 같고 다소 정신나간 이들의 끝없는 자기 변명도 같은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후앙 미로(Joan Miro) 들이 파인아트 분야에서 이름을 내고 있을 때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는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있었다. 실제로 스키아파렐리는 살바도르 달리, 마르셸 뒤샹, 만 레이하고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패션에 초현실주의를 적극 차용하며 패션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 랍스터 드레스, 구두 모양의 모자, 손톱을 붙인 장갑 등은 이들과 교류하며 나온 것들이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모습. 벨 에포크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스키아파렐리. 정작 자신은 못생겼다고 속상해 했다. 집안 사람들 인물이 다들 훤칠한 듯.

그녀가 패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의 유쾌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접고 파리에 와서였다. 그때 만나 스키아파렐리에게 패션을 권유한 사람이 폴 푸아레(Paul Poiret). 그녀가 왜 패션을 예술로 접근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키아파렐리는 아주 지적인 사람이었다. 16살 때는 시집도 내고, 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하고(전공은 아니고 청강이었다),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지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탈리아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동양학자였던 아버지, 천문학자인 삼촌을 두고 있었던 배경도 한 몫했다.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주해서 없이는 보지 못하는 문학적 은유들이 꽤 많다. 패션계에서 자서전을 낸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하나는 폴 푸아레고 또 하나는 스키아파렐리다. 너무 지적이었던 그들이 패션계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한건 아이러니이지만.

지금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당시에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스키아파렐리의 트롱포뢰유 니트. 바로크 시대 화가들이 주로 썼던 재밌는 기법을 재밌게 차용했다.

 

패션에 예술을 끌어들였다고 해서 그녀가 비즈니스적으로 성공을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니트에 리본모양을 직접 넣어 뜨개질을 해 마치 리본을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둔다. 흔히들 트롱프뢰유라고 하는데 가짜인데 마치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법이다. 바로크 시대의 그림을 보면 그림 위에 커턴을 살짝 쳐 놓았는데 진짜 커텐이 아니라 사실은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마치 커텐이 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니트의 큰 성공으로 그녀는 쿠튀르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냈다.

초현실주의의 패션디자인 버전. 패션의 가장 큰 이점은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해도 모두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점이다.

극작가였던 장 콕토가 그린 일러스트를 이브닝 코트 넣기도 하고,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만들어준 곡예사 모양의 단추를 달고, 살바도르 달리의 가재를 드레스에 과감하게 넣었다. 그녀의 이런 시도는 헐리우드 배우 캐서린 햅번, 메 웨스트(그녀의 몸을 따와 향수 ‘쇼킹’에 사용하기도 했다), 마들렌 디트리히 그리고 에드워드 8세의 부인인 심슨 부인 등이 단골로 찾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문학과 극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던 스키아파렐리는 헐리우드 영화의 의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녀의 예술적 감각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el)이 치를 떨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게 했다. 스키아파렐리가 패션계에서 손을 뗄때까지 샤넬은 스키아파렐리의 예술적 재능을 매우 부러워하고 의식했다고 한다.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이런 컨셉추얼한 쿠튀르 드레스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스키아파렐리에게도 시련이 닥쳤는데 그 시련은 1,2차 세계대전이었다.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간호사로도 활동을 하고 프랑스를 전쟁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샤넬이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것과는 참 대조적인 부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로 복귀한 스키아파렐리는 이전과는 다르게 성공을 하지 못했다.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고 쿠튀르에 대한 수요도 상당히 없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패션을 비즈니스보다는 예술로 접근하면서 파리의 패션하우스의 생산 시스템에 너무 젖어있었다. 세상은 이미 미국의 대량생산 방식을 쫓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1954년 스키아파렐리의 아틀리에는 문을 닫았고 그녀는 패션계에서 은퇴한다. 그 후 튀니지에 있는 하마멧에 자주 머무르면서 자서전도 내고 조용히 삶을 마쳤다.

현대의 패션디자이너들이 스키아파렐리에게 헌정하는 오마주들.,

패션계에 불꽃처럼 등장해 가장 환하게 빛을 내다가 소멸하고 만 스키아파렐리. 샤넬처럼 대량생산에 익숙한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백이나 슈즈로 수익을 냈더라면 멋진 작품들을 더 보여주었을텐데 아쉽기만 하다. 하긴 샤넬처럼 살았다면 스키아파렐리가 될 수 없었겠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복식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씩 회자되는 엘사 스키아파렐리. 스키아파렐리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오마주를 바칠 정도로 영향을 많이 미쳤다. 스키아파렐리가 여성들에게 한 조언 중 하나로 글을 마치려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항상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라.”

디자인유학플러스+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 612-14 3층
02-337-0369/070-7135-7159
consulting@designuhak.com